카를 호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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목차
1. 개요2. 생애
2.1. 선수 생활2.2. 이후
3. 플레이 스타일 & 평가4. 뒷이야기5. 수상
5.1. 클럽5.2. 국가대표5.3. 감독

1. 개요 [편집]

독일의 나치 독일시절 축구선수.

2. 생애 [편집]

2.1. 선수 생활 [편집]

2.1.1. 클럽 [편집]

호만은 8살 때부터 고향팀 벤라트에서 축구를 시작하였고, 1929-30 시즌에 1군에 합류하였다. 벤라트는 1932-33 시즌까지 서부 독일 연합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, 베르크-마르크 지역 내에서는 수위권 안에 드는 전력을 보였다. 하지만 파울 야네스 등이 이끄는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밀려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고, 컵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만족해야했다.

1933년 이후에는 가우리가[2]와 컵 대회에 참가하여 득점포를 가동하였다. 특히 컵 대회에서는 9경기 출전 10골을 득점하는 해가 있기도 했다. 벤라트는 2차례 가울리가 니더라인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지만 파울 야네스 등이 소속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가 더 강력한 전력을 보였고, 독일 축구 챔피언십 본선에서는 샬케 등에 밀려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.

2.1.2. 국가대표 [편집]

호만은 1930년 9월 덴마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. 팀은 3대6으로 패배했고, 68분에 3대5로 따라붙는 만회골을 데뷔골로 기록하였다.

1934년 월드컵에서 호만은 8강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. 스웨덴을 상대로 독일은 2대1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딱 2골을 넣은 것. 독일은 이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였다. 또한, 호만은 올림픽에도 참가했는데 2라운드에서 결장하였고 팀은 패배했다.

호만의 마지막 A매치는 1937년 라트비아와의 경기였고, 선제골을 넣으며 3대1의 승리를 이끌었다.

2.2. 이후 [편집]

1947년부터 코치 생활을 시작한 호만은 1949년 로트바이스 에센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. 호만이 에센의 감독으로 거둔 가장 큰 소득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열린 DFB 포칼에서 헬무트 란 등이 이끄는 알레마니아 아헨을 2대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. 1954년, 호만은 에센의 감독직을 프리츠 슈체판에 넘겼다. 1962년 이후에는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.

호만은 197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.

3. 플레이 스타일 & 평가 [편집]

호만은 민첩하면서 폭발력 있는 공격수였다. 페널티 박스 안에서 위치 선정과 슈팅 능력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.

4. 뒷이야기 [편집]

  • 호만은 감독직을 하면서 스포츠 용품점도 경영했다.
  • 벤라트의 홈구장 인근의 길은 칼 호만의 이름을 따 칼 호만 거리로 명명되어있다.

5. 수상 [편집]

5.1. 클럽 [편집]

  • 가울리가 니더라인 우승 2회: 1934, 1935(VfL 벤라트)
  • 서부 독일 연합 축구 대회 베르크-마르크 우승 1회: 1929-30(VfL 벤라트)
  • 서부 독일 협회 컵 우승 2회: 1931, 1932(VfL 벤라트)

5.2. 국가대표 [편집]

5.3. 감독 [편집]


[1] 현재 7부리그 소속이다[2]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리그. 여기에서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 참가자격이 주어졌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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